[강대식의 여행스케치] 화진포로 달리는 특별한 여행
[강대식의 여행스케치] 화진포로 달리는 특별한 여행
  • 정준규 기자
  • 승인 2016.08.18 1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대식 사진작가ㆍ수필가

[글ㆍ사진 강대식] 3일간의 연휴.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황금 같은 휴일이다. 월요일이 8.15 광복절인 관계로 만들어진 휴일에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다가 동해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힐링여행을 떠나 보기로 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년이 되었다. 그 후 하루 일정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온 기억은 있지만 며칠을 같이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없어 죄송스러웠다. 아흔 살이 넘으신 어머니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설레기도 하고 너무 힘드셔서 피곤해 하시지는 않을지도 걱정이 된다. 집 사람 보다는 어머니에게 누나들이 편할 것 같아 누님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여행길은 편안해야 하는데 시작부터 머리 아프다.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에 도착하자 이미 고속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속 10km도 안 되는 속도로 나아가는 길은 이미 고속도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게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동안 자꾸만 졸음이 쏟아진다. 졸음이 쏟아져도 쉴 곳이 없다. 졸리워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힘겹게 6시간이 지나서야 현남 나들목에 도착하여 달래촌으로 갈 수 있었다.

현남 나들목에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달래촌은 중학교 선배님이 이장을 맡아 역동적으로 키워 나가는 농촌테마 마을이다. 10년 만에 와보니 많이 변했다. 촌장님을 만나 숙소를 배정받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화진포 바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고성 화진포로 향했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많이 걷지 않고 구경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니 화진포가 제격일 듯 했다. 그러나 화진포로 향하는 도로도 오고가는 차들로 가득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강원도로 모여든 것 같다.

바닷가 모래가 있는 백사장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조금 나아지려나 생각했지만 현실은 내 생각과 많이 달랐다. 화진포호는 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 형성된 석호로 담염호라 한다. 둘레가 16km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로 동해안에서 제일 크다.

화진포 생태박물관

화진포생태박물관에 운석(隕石)을 전시한다고 하여 먼저 박물관으로 향했다. 화진포 호수를 바라보며 지어진 3층의 조그마한 박물관은 입구에 생태박물관에 걸 맞는 조경을 해 놓았다. 두루미가 노니는 모습과 게 모형이 화단을 장식하고 있으며 커다란 소나무가 이곳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지역임을 자랑하듯 서 있다.

화진포생태박물관에 전시 중인 운석

자연생태계를 설명하는 박물관 3층에 세계 각지에서 구해온 갖가지 돌과 운석 한 점이 자리하고 있다. 마노석, 황철석, 수정, 화석 등이 종류별로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다. 운석 전시라는 플랭카드 때문에 많은 운석이 전시되고 있을 것이라 믿었건만 전시된 운석은 달랑 1점뿐이다. 그것도 조금 큰 무 정도의 크기였고, 돌이라기보다는 쇠뭉치처럼 생겼다.

철광석 성분이 지구의 자원과 비교해 볼 때 100배 이상 높다고 한다. 구술만한 자석이 붙어 있어 혹이 달렸는지 알았다. 2년 전 ‘하늘의 로또’로 불리는 운석이 경남 진주 지역에 떨어져 운석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떨었던 사건이 생각났다.

12일 밤부터 13일 새벽까지 북동쪽 페르세우스 별자리에서 별동별이 쏟아져 내리는 우주쇼가 진행되어 누구나 쉽게 별똥별을 볼 수 있었다. 마당에 누워 13일 밤 2시경 30분 동안 13개의 별똥별을 보았으니 유성이 많이 떨어졌을 것이나 우리나라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만큼 운석을 찾는 것이 쉽지 않고 그런 이유로 가치 또한 크다.

이기붕 부통령 별장으로 가는 길

이기붕 부통령 별장으로 향했다. 자연생태박물관에서 10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별장은 3칸으로 된 작은 건물이다. 1920년대 선교사에 의해 건축된 것으로 해방 후 북한 공산당 간부휴양소로 사용되던 것을 정전 후 부통령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해 왔다고 하여 이기붕 별장으로 불려지고 있다.

소나무를 병풍처럼 드리운 곳에 지어진 건물은 고관대작의 별장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할 정도로 규모도 작고 협소하다. 돌담 벽 건물은 담쟁이넝쿨로 뒤 덥혀 있으며, 작은 응접실과 침실, 사무실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이 별장이 주목 받는 것은 화진포의 아름다운 경관과 바다 그리고 김일성, 이승만 별장과 더불어 같은 지역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백사장 인근에 이기붕 별장이 있다면 해변 위쪽 작은 야산에는 김일성 별장이 있다. 1938년 독일 건축가가 지어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지하1층 지상 2층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계단 위에 건물을 짓고, 돌로 외벽을 장식하였으며, 전면부를 아치형으로 모양을 낸 서구식 형태의 구조였다.

해안 절벽 위 아름다운 송림 사이에 지어진 이 건축물은 ‘화진포의 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귀빈 휴양소로 사용해 왔고,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김정일 형제가 묵고 갔다고 하여 이후 김일성 별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건물이 훼손되어 이를 철거하고 1964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건축하였다.

2층 옥상은 마치 유럽의 성곽과 같은 모양으로 건축하여 동해의 푸른 물과 화진포 해수욕장의 백사장을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옥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으면 바람을 타고 전해오는 바다의 비릿한 내음과 솔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화진포 호수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과 기념관으로 향했다. 화진포 호수 가운데를 나누어 다리를 놓았다. 화진포 호수를 바라보며 산 중턱에 지어진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에 오르자 화진포 호수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며 화진포 호수를 바라보며 국정을 구상하고 어떻게 국가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원래 화진포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온다. ‘이화진이라는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 시주를 위해 찾아오는 건봉사 스님을 늘 골탕을 먹였다고 한다. 이를 미안하게 생각했던 며느리가 뒤쫓아가 스님에게 시주를 하며 시아버지의 용서를 빌자 스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얼마 후 하늘이 무너질 듯 큰 소리가 나자 며느리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이화진이 살던 집과 논은 순식간에 호수로 변해 버렸고, 며느리는 애통해 하다가 돌이 되었다’고 한다. 이 호수가 지금의 화진포 호수이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한 형태를 구성하는 전설(傳說)속에는 항상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善)적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교훈을 알려 준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흐르던 땀방울을 식혀 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시절 진해, 서울 마포 등에도 별장을 두었는데 이곳 화진포 별장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규모나 시설이야 진해나 마산별장이 더 화려하고 웅장하며 크겠지만 정치적 결단이나 시국의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한 마음의 정리를 필요로 할 때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화진포가 제격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던 물품과 서신 등 격동하던 1950년대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기념관을 거닐며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노력하며 독립투사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6.25전쟁과 화염에 불바다가 된 조국을 다시 재건하기까지 고단한 삶을 살았던 정치인의 흔적을 본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영원한 자유를 누리자(富國兵强 永世自由)”를 부르짖던 노 정치인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아마도 일제 36년간의 식민지배와 광복 5년 만에 공산당의 6.25 남침으로 짖밟힌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가장 가슴속에 서럽게 남아 있었을 아픔을 글로써 풀어내 보였을 것이다. 이곳 화진포는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지만 한국사에 있어서는 결코 평화롭게만 보아서는 안될 안보교육관이다.

화진포 호수를 떠나 금강산 건봉사(乾鳳寺)로 향했다.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이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인적이 뜸해 한적한 고찰이지만 여름이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겨울에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눈이 쌓이면 쉽게 접근하기도 어렵다. 입구에 심겨진 수백 년이 됨직한 소나무들이 건봉사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건봉사는 법흥왕 7년(520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기는 하나 명확하지는 않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末寺)로 거느렸을 만큼 큰 대사찰이었으나 1878년 큰 화재로 당시 건봉사의 건물 중 3천 칸이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들도 6.25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찬란하던 과거의 광영은 절터와 절 입구의 불이문(不二門)만이 유일하다고 하니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지금 옛 건물의 흔적은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 있다. 건봉사 불이문은 기둥이 4개로 1920년에 세워졌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법고를 놓아둔 범종각이 있고 그 앞에 솟대 모양의 3m 정도의 돌기둥이 있다. 돌기둥에는 나무아미타불의 한자식 표기인 ‘南無阿彌陀佛’이 음각되어 있고,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어 솟대로 보인다.

산신각 가는 길
적멸보궁

조금 더 올라 바로가면 산신각과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고, 우측 계곡을 건너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인 능파교(凌波橋)가 걸려 있다. 능파교는 숙종 30년(1704년) ~ 숙종33년 사이에 만들어 진 것이 영조 21년(1745년)에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영조 25년(1749년)에 중수하였으나 1880년 다시 무너졌고 현재의 것은 2005년에 복원된 것이다.

적멸보궁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온 뒤 세운 것으로 이로부터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었다고 한다.

능파교

건봉사 경내를 내려오자 수십 명의 바이크족이 몰려왔다. 35도를 웃도는 날씨임에도 검은 재킷을 차려입은 그들의 입성은 바이크의 요란한 굉음과 옷차림으로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 먼 곳까지 달려온 기분을 천천히 경내를 감상하며 느끼고 돌아갔으면 한다.

굉음만 일으키는 거리의 무법자가 아니라 문화를 아는 멋쟁이 문화시민이라는 것을 알린다면 비호감이 호감으로 바뀌지 않을까. 입구를 빠져 나오는 우측에 야트막한 기와 담으로 둘러친 터에 50여 기에 달하는 부도와 탑비가 있다. 원래 2백개가 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많이 분실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문화재를 발굴하여 판매하는 도굴범들이 훼손했을 것이다.

역사적 유물을 잃어버리는 것은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우리 문화를 사장(死藏)시키고 잃어버리는 것이다. 남은 것만이라도 잘 보존해야 한다. 무더위에 지친 화진포를 떠난다. 서쪽 하늘에 엷은 노을이 번진다. 비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강 대 식 사진작가 · 수필가

 ▶충북사진대전 초대작가

 ▶충북 정론회 회장 

 ▶푸른솔문학 작가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