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28] 문의 벌랏마을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28] 문의 벌랏마을
  • 세종경제뉴스
  • 승인 2022.10.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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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 삶의 풍경을 찾아 떠나는 길
벌랏마을의 가을풍경 / 사진=충청북도

아름다운 길은 두리번거리게 한다. 직선의 길이 아니라 곡선의 길, 이따금 언덕이 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낯선 풍경을 바라보고 느림의 미학을 담는다. 꽃들의 잔치에 매료되려면 북풍한설을 뚫고 피어난 매화쯤은 되어야 한다. 조선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꽃 매화. 화려하지만 넘치지 않는 아름다움, 가난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지조, 추운 겨울의 시련을 이겨내고 피어난 매화의 정신과 향과 결을 따라 자박자박 걸으면 좋다.
 봄꽃이 지고 여름이 오기 전에 난초의 향기에 젖으면 이 또한 삶의 행복이 아닐까. 가람은 난초의 여리고 순한 마음과 자신의 향기를 함부로 팔지 않는 정조를 높이 평가하면서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볼까”라며 난초의 향을 엿보는 설렘을 노래했다. 매월당 김시습과 악성 박연, 그리고 다산 정약용도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난초의 아름다움을 시심에 담지 않았던가.
 가을의 전령은 단연 국화다. 지천으로 피었다 지는 꽃들이 얼마나 많을까만 그중에서도 들판에 다소곳이 피어난 국화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국화 옆에 서자. 코끝이 찡하게 향기로운 꽃들의 잔치에 눈물이라도 울컥 쏟아질 것 같다. 그래서 미당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며 국화에 대한 순정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대청호의 풍경
대청호의 풍경

오늘은 구불구불한 곡선의 길을 찾아 나섰다. 주름진 풍경 속에 유년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문화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볼 수 없다는 절박감도 있었다. 여기는 청주의 끝자락, 대청호변에 자리잡은 숲속의 마을 문의면 소전리 벌랏마을이다. 
 오래전부터 닥나무를 재배하고 한지를 뜨는 마을로 명성을 떨친 곳이다. 닥나무는 천 년의 한지를 만드는 원료다. 예전에는 닥나무 재배를 하고 한지 뜨는 마을이 많았는데 절멸위기에 처해 있다. 대한민국을 통틀어도 10여 개 마을이 남았을까. 하는 일이 고되고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값싼 수입 종이가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닥나무를 재배하고 한지를 만드는 사람은 돈벌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고유의 삶과 멋, 역사의 맥(脈)이 단절되면 안된다는 절박감과 해야 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고 했다. 한지는 500년 가는 비단보다도 더 귀하고 오래 가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의 의궤가 세계유산이 된 것도 한지 때문이다. 닥나무를 재배하고 수확하며 뜨거운 물에 삶고 껍질을 벗긴다. 닥풀과 잿물을 함께 넣어 물에 풀어야 하고 한 장 한 장 뜨고 말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99번 장인의 손을 거쳐 마지막 100번째 쓰는 이의 손길이 있어야 한지가 완성된다고 해서 백지(百紙)라고도 부른다.
 한지를 사용하면 미세한 자연의 향기와 숨소리가 끼쳐온다.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며 우리 고유의 삶과 멋에 매료된다. 우리의 문화는 서양의 그것과 달리 젖고 물들며 스미는 구조다. 이 마을의 한지를 지키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종국 작가다. 직접 닥나무를 재배하고 한지를 뜨며 이를 활용한 다양한 아트상품을 만든다. 지역보다 서울에서, 해외에서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종국 작가의 예술세계에 매료되거나 한지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그래서 이 작가는 한지와 자연예술을 컨셉으로 교육프로그램, 레지던시 프로그램, 자연예술 체험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대청호 자연을 소재로 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최고의 예술은 자연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예술행위는 자연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이 작가가 하는 모든 것이 자연예술이다.

이종국작가의 닥나무 한지작업 / 이종국작가한지 달항아리 / 대청호 녹조로 만든 달항아리(사진왼쪽부터) / 사진=충청북도
이종국작가의 닥나무 한지작업 / 이종국작가한지 달항아리 / 대청호 녹조로 만든 달항아리(사진왼쪽부터) / 사진=충청북도

천년고찰 월리사와 마동창작마을은 가는 길에 들려도 좋고, 되돌아오는 길에 들려도 좋다. 월리사는 1500년 된 충북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삼국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보름달 뜨면 더울 아름다운 사찰이 아닐까. 마동창작마을은 폐교가 예술의 보고(寶庫)로 재탄생한 곳이다. 20년 전 학생 수가 너무 적어 폐교된 학교 건물을 이홍원 작가 등이 매입, 개조하여 갤러리와 무인카페로 운영 중인 시설이다. 학교 내부는 그림 작품을 걸어둔 갤러리가, 운동장에는 조각공원이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름다움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몸에 배어들기 시작하는 ‘아우라’를 말한다. 아우라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몸짓이다. 히브리어 토브(tob)는 ‘착하고 향기로움’을 뜻한다.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내며 지켜내는 행위다. 자연이 그렇듯이 우리의 본질, 인간의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나서자.  
  사진 김영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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