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음악칼럼니스트] 우주를 노래하다
[이영민 음악칼럼니스트] 우주를 노래하다
  • 이영민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13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G. Holst The Planets Op.32
구스타브 홀스트
구스타브 홀스트

‘음악은 하늘에서 나와 사람에게 깃든 것이며 허공에서 나와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느껴 움직이게 하고 혈맥을 뛰게 하며 정신을 흘러 통하게 한다’. 

성종때 간행된 악학궤범의 서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음악이론서인 이 책의 서문은 당시 예조판서였던 성현(1439~1504)의 글로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음악철학의 지고한 경지를 담백하고도 명료한 문체로 담아낸 명문이다. 음악의 뿌리를 하늘, 즉 우주의 운행원리에 두고 사람의 심신을 움직이게 하는 매체로 이해하고 있다.

 의외로 서양의 경우도 그 근본이 크게 다르지 않다. 5세기 후반 마지막 로마인으로 불리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 보에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음악의 원리에 대하여>에서 음악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가장 높은 경지의 음악인 우주의 음악(Musica mundana)는 우주와 자연의 조화를 뜻하고 다음으로 인간의 음악(Musica humana)은 소우주라 불리는 인체의 조화를 일컫는다. 마지막으로 도구의 음악(Musica instrumentalis)가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일반적인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목소리로 연주하는 성악의 경우는 도구의 음악에 해당한다.

 음악은 일정한 진동비를 가지고 있는 음들이 서로 질서있게 수학적 조화를 이루는 예술이라 정의할 수 있다. 지구인의 입장에서 해와 달, 별들의 움직임에 따라 사계절과 밤낮이 교차하며 이뤄내는 거대한 자연의 음악은 철학자들과 작곡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수많은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들은 방대한 그리스 신화에 녹아들며 르네상스 이후 음악가들의 단골 주제로 등장한다.

 1913년 닐스 보어가 양자역학의 역사에 중요한 획으로 남을 3개의 논문을 세상에 내놓던 그 해에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1874~1934)는 태양계의 일곱 행성에 관한 관현악 모음곡을 착상한다. 과학계가 미시세계의 불확실성에 눈을 뜬 최첨단의 시대에 점성술에 빠져든 작곡가의 행보는 어찌 보면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일 수도 있지만 우주로 향한 현대인들의 도전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고 과학의 발전과 별개로 예술가들은 현상으로부터 감각적인 깨달음을 추구해나간다.

 홀스트의 모음곡 ‘행성’은 1914년부터 작곡이 시작되어 1916년에 완성된다. 당시엔 명왕성이 발견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해왕성까지 지구를 제외한 일곱 개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재미있는 점은 홀스트가 아직 생존해 있던 시기인 1930년 명왕성이 태양계에 추가되어 사람들이 명왕성을 모음곡에 추가할 생각이 없는지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2006년 명왕성이 왜행성으로 태양계 행성에서 퇴출된 이후에야 명왕성에 대한 음악가들의 구설이 사라지게 된다.

 작품은 화성(전쟁을 가져오는 자)로부터 시작된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표현한 이 악장은 5박자의 강렬한 리듬을 몰고오며 시작되는 이 악장은 마치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작곡된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후대에 존 윌리엄스가 스타워즈의 OST를 작곡할 때 큰 영항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이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표현한 금성(평화를 가져오는 자), 여행의 신 헤르메스를 묘사한 수성(날개달린 정령), 주신 제우스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표현된 목성(환희를 부르는 자),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주인공인 토성(과거를 부르는 자), 신들의 아버지인 우라누스의 비밀스런 모습을 묘사한 천왕성(마술사), 마지막으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신비한 분위기를 그린 해왕성(신비로운 자)로 마무리된다.

 아무래도 목성이 가장 유명한 악장으로 남아있는데 목성의 첫 도입부는 1980년대 뉴스채널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에게 일상의 배경처럼 각인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악장의 중간부 주제는 I Vow To Thee My Country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하노라)라는 제목의 노래로 불려지며 영국에서 제2의 애국가처럼 불리는 음악으로 중요 행사에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전 곡을 모두 연주하기엔 작품자체의 연주상 난이도가 높고 편성도 거대한 탓에 홀스트의 행성 모음곡은 작곡가의 생전엔 자주 연주되지 못했고 범상한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사후 천문학의 발달과 우주 탐사의 시대가 도래하며 작곡가의 대표작으로 남게된 작품이다.

 한국의 자체 우주탐사로켓인 누리호의 성공과 미국의 나사가 주도하고 대한민국도 참여하고 있는 아르테미스 계획이 새롭게 진행되면서 그 어느 때 보다 하늘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 고대인들이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의 운행을 보며 써내려간 이야기들을 토대로 작곡된 명곡인 홀스트의 관현악 모음곡 ‘행성’을 추천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