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 권희돈 교수
  • 승인 2022.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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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돈 교수
권희돈 교수

받아들임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자신의 태도이다. 외부의 자극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 부정적인 자극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상황이 호전되고, 긍정적인 자극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상황이 악화된다. 인간에게 최악의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다. 절망이 오더라도 놀라지 말자. 절망 속에는 반드시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적인 상황으로 바꾸는 성스러운 에너지가 숨어 있다. 그 성스러운 에너지를 찾아내면,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고, 남은 삶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우게 된다.                                       
                                          
비교의 대상을 아래로 두거나,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태도도 성스런 받아들임이지만,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성스러운 에너지이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바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재의 빛’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를 위해 살거나, 과거의 스토리에 빠져 과거를 재탕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다. 과거는 돌아갈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 순간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놓치는 것이다.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근본적인 받아들임’을 할 수 있다면, 무가치감의 트랜스에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그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타라브랙/김선주 외, <받아들임>, 옮긴이의 말 중에서)     
 
 어느 000교수의 이야기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퇴근 후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워졌다. 무기력에 빠진 아내가 누워만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무기력은 아들 형제 다 장가보내고 나서 더욱 나빠졌다. 어느 날 그가 집에 들어왔을 때 현관에 신발이 여러 켤레 놓여 있었다. 방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두 며느리가 서로 어머니를 모셔가라며 방 한가운데서 다투고 있었다. 두 아들은 말없이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문을 살짝 닫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아내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여보 미안해.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어. 
이제 당신 곁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을 거야.’

남편의 진심어린 말 한 마디에 얼음장 같이 차가왔던 아내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초점 잃은 아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다음 날 학교에 사표를 내고는 오직 아내를 위한 일에만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끊임없이 아내와 대화하고, 아내를 위한 식단을 짜고, 쉬지 않고 아내와 함께 걸었다. 2년 만에 그의 아내는 정상인으로 회복되었다. 
병든 어머니를 떠맡으려 하지 않는 자식들의 모습은 우리나라 여느 가정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태도는 여느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만약 그가 자식들이 싸우는 현실만을 보았다면, 우리나라 여느 가정에나 볼 수 있는 부모자식 간에 서로를 탓하는 꼴사나운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내의 병은 깊고, 아들 며느리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깊은 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돌보는 일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임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연구업적 쌓는 일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아내를 돌보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기로 마음먹고 실천하는 태도는 성스러운 받아들임이다. 성스러운 마음의 변화이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사회적 자아를 물리치고 오직 아내를 돌보는 일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가정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자식들을 불효자로 만들지 않고, 아내를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자식들의 고통을 덜고 아내를 치유시키고 결국 자신도 치유를 받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변화란 이런 것이다. 귀찮고 부담스런 존재에서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을 거부하거나 물리치지 아니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아버지가 책임을 떠안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지켜내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른이 어른의 도리를 다 할 때 젊은이가 어른을 믿고 따른다는 진리의 모범을 보는 듯하다. 힘없는 어른이 아닌 책임져야 할 일을 책임지는 어른의 자세가 존경스럽다.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도 역사의 위인이지만, 위기에 빠진 가정을 구한 000교수도 시대의 위인이다. 모든 가정의 아버지가 혹은 모든 공동체의 리더가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時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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