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최고의 사랑
[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최고의 사랑
  • 세종경제뉴스
  • 승인 2022.03.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희돈 교수
권희돈 교수

세상의 중심에 놓인 사랑은 부부사랑이다. 하지만 부부사랑은 가까운 만큼 빨리 시들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결혼할 때는 당신 아니면 못 산다 하다가, 얼마쯤 살다가는 당신 때문에 못살겠다고 한다.
“사랑, 그와 그녀의 사랑, 그게 가버렸다면,
그것들은 어디로 갔지?”
(파블로 네루다 : 「질문의 책」 22번 시 부분)
사랑이 식어버린 것도 문제지만, 그날이 그날 같은 자동화된 삶의 방식이 부부 사이의 위기를 몰고 온다. 이를 잘 알아 차려서 멀리 가버린 사랑을 다시 불러오는 것, 그것이 나는 ‘최고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불러오는 마중물은 정감어린 말 한 마디 ‘사랑해’로부터 시작된다.
아내가 식탁에 메모 한 장 놓고 외출했다.
당신에게 바라는 점
★ 외출 중에는 두 번 이상 사랑한다고 전화하기
★ 멀리 출장 갔을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기
아내와의 전화는 힘이 부친다.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니까 듣기 힘들다. 그런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전화 하라니. 그리고 전화하면서 사랑한다, 라고 말하라니.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정으로 사는 거지 꼭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하나. 아내의 일방적인 요구에 은근히 부아도 나고, 무엇보다도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다는 게 아무래도 오글거린다. 이보다 더 큰 형벌은 없는 듯싶었다. 무시해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왠지 찜찜해서 메모지를 주머니 속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자꾸 주머니 속이 궁금해진다. 전철 안에서 메모지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꾹꾹 눌러 정성스럽게 쓴 글씨였지만, 내려 긋는 선 몇 개가 살짝 흔들렸다.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 같았다. 언젠가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외로워서 죽는대.’ 가슴이 조금씩 아려왔다. 내가 너무 무심한 건 아닐까. 타인은 가까운 사람처럼 여기고 정작 가까운 아내는 타인처럼 여겨온 것이 아닐까. 차라리 이러저러해서 당신과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써 놓았으면 아린 가슴앓이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내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겼다.
사랑한다, 는 말을 하던 첫날은 얼마나 힘들었던지.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고 모기만한 소리를 내는 데도 식은땀이 흘렀다.
며칠 후 또 아내의 메모가 식탁에 놓여 있었다. 이번 메모는 문장이 좀 보태졌다.
“사랑해 소리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져. 그런데 나는 당신이 전화 끊을 때는 ‘사랑해. 하고 끊었으면 좋겠어.”
마음이 편안해져, 라는 글귀를 보니까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헌데 꼬리가 붙어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전화할 때마다 사랑해 소리를 두 번씩 하라는 뜻이다. 그래도 내 친 김이니 계속 하기는 해야지. 젖 먹던 힘을 다해 매일 전화할 때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사랑해’ 하고 끊었다. 며칠 후의 메모장에는 꼬리가 더 붙었다.
“사랑해, 하고 그냥 끊지 말고, 끊어요, 하고 끊으면 어떨까.”
‘어쭈, 갈수록 태산이네.’ 이러다가 한도 끝도 없이 꼬리가 붙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기가 생겨 딱딱 끊기는 목소리로 ‘사랑해, 끊어.’ 하고 통화를 마치곤 하였다. 며칠 후에 적힌 메모는 아내가 마치 내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끊어요, 나는 이 소리가 제일 듣기 좋더라.”
습관은 참 편하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아내와 전화로 밀고 당기는 사이 조금씩 아내에게 길들여져 갔다. 좋은 습관은 라이프스타일을 긍정적으로 바꾼다.
아내가 시시콜콜 하는 말이 점차 시냇물처럼 리듬감 있는 소리로 흘러들었다. 결혼하고 몇 십 년 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런 날이 100여 일째 되는 날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립 서비스라도 괜찮아요. 사랑해요.”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보니 기계적으로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자존심에 금이 가는 듯도 하였다. 하지만 아내의 간절한 속마음이 읽혀졌다. 아내한테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남자가 아니라 친구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말을 듣고 싶어 하고,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한다고 한다. 아내의 속마음을 읽었으니, 아내로부터 인정받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겠다. 사랑은 표현이니까..(時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