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만이 누구기에 옥산에 ‘독립운동마을’ 조성하나
정순만이 누구기에 옥산에 ‘독립운동마을’ 조성하나
  • 이재표
  • 승인 2019.03.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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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옥산 덕촌이 고향…헤이그밀사 지원‧이토히로부미 저격 모의
연해주 한인사회 내부갈등 피살…고향 마을선 47년째 만세운동 재현
해마다 삼일절 기념식을 여는 덕촌리 주민들. 사진은 2016년 기념식 광경.
해마다 삼일절 기념식을 여는 덕촌리 주민들. 사진은 2016년 기념식 광경.

비운의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의 고향인 청주시 옥산면 덕촌리에 독립운동마을’이 조성된다. 충북도는 22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독립운동마을 조성3개 사업이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공모 사업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덕촌리에는 정순만 선생의 독립협회 활동과 국권 회복운동 활동 기록을 전시하는 기념관을 건립하게 된다.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비는 19600만원이다.

덕촌리에 독립운동마을을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정순만 선생의 고향이라서가 아니다. 해마다 삼일절이면 덕촌신협 앞마당에 군중이 운집한다. 출향인사들도 돌아오고 인근 동리에서까지 모여든 사람들이 500명에 이를 때도 있다.

덕촌교회 성가대는 찬양이 아닌 독립군가를 부른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허수아비를 불태운다. 삼일절 노래를 제창하고 만세삼창으로 행사가 마무리된다. 그리고 신나는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1972년부터 이어지는 행사다. 삼일절 기념식이야 31일 방방곡곡에서 열리겠지만 ()’ 단위에서 열리는 자발적 주민행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처음에는 1909년에 세워진 덕촌교회와 1968년에 설립된 덕촌신협, 청년회 등이 주관해 행사를 열어왔고, 1996년부터는 덕촌을 사랑하는 사람들(덕사모)’가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덕촌리는 220여 호가 모여 사는 제법 큰 동네다. 한때는 시집온 사람들 빼고는 모두가 하동 정씨였다는데, 지금은 40% 정도가 다른 성씨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성적으로 삼일절을 기리는 것일까?

정순만 초상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 아들의 얼굴을 토대로 추정해 그렸다.
정순만 초상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 아들의 얼굴을 토대로 추정해 그렸다.

 

덕사모 관계자는 마을 어른 중에 정순만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동네에서 꽤 부잣집 자손인데, 독립협회에서도 활동했고, 마을에 근대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나중에는 연해주로 갔는데 거기서 불행하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분을 기리기 위해 기념행사를 연다고 말했다.

역사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정순만이라는 이름이 귀에 설 것이다. 정순만 선생은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3으로 통할 정도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사진 한 장이 남아있지 않고, 지금 그의 얼굴로 통하는 초상도 훗날 아들의 얼굴을 토대로 추측해 그린 것이다. 이처럼 그의 흔적이 지워진 것은 말 그대로 불행한 죽음때문이다.

 

 

헤이그밀사 지원, 이토 히로부미 저격 모의

정순만 선생(이하 정순만)1873년 청주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전기의병 참여로 민족운동의 길에 들어섰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근대학교인 덕신학교를 세웠고, 서울 중구에 있는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이승만, 박용만,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활동했다.

정순만은 상동청년회의 리더였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했고, 을사오적 암살을 꾀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06년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갔다. 이상설, 이동휘 등과 용정에 터를 잡았다.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도 정순만이 이상설과 함께 세운 것이다.

한때 동네부자였으나 독립운동으로 가세가 기운 정순만 생가. 유족들은 떠나고 집은 비어있다시피 하다. 생가를 안내하는 정근래 덕촌신협 상무 사진=박상철 기자
한때 동네부자였으나 독립운동으로 가세가 기운 정순만 생가. 유족들은 떠나고 집은 비어있다시피 하다. 생가를 안내하는 주민.사진=박상철 기자

정순만이 북간도에 이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은 곳은 블라디보스토크다. 이곳에서 해조신문을 창간했다. 대동공보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그는 계몽과 무장투쟁을 병행하는 전방위적 투쟁론을 견지했다. 대표적인 것이 헤이그밀사 파견을 지원하고 안중근 의사와 공모한 것이다. 정순만은 1907년 김학만, 이동휘와 함께 헤이그밀사 파견에 8만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했다. 1909년에는 대동공보사에서 여러 차례 안중근과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세웠다. 이는 일제의 비밀자료에도 실려 있다.

불행의 씨앗이 싹튼 것은 1910123일이다. 정순만이 연해주 한인사회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양성춘을 권총으로 쏴 죽인 것이었다. “오발사고이니 절대로 정순만에게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 양성춘의 유언이었다. 재판결과도 과실살상을 적용해 ‘3개월 수감과 사원(寺院)에서 참회였다.

정순만은 191128일 출소했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 정순만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홍범도 등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논의했다. 하지만 양성춘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순만은 1911621일 양성춘의 미망인과 형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다. 71일 이상설 등이 정순만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으나 그가 묻힌 곳이 어딘지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2013독립운동계의 3, 정순만이라는 제목으로 675쪽 분량의 방대한 책을 쓴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정순만 선생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내분에 의해 살해당하다 보니 쉬쉬한 측면이 있지만 독립운동의 업적은 누구보다고 높이 기릴만하다고 평했다.

 

전국공모 선정 ‘12개 중 3개가 충북

삼일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6(정춘수는 이후 친일로 변절)을 배출한 충북이 정부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공모를 휩쓸었다.

이번 공모는 행정안전부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공동 주관했으며, 서면·발표 심사를 거쳐 전국에서 12개 사업이 최종 선정됐다. 충북은 광역지자체 중 가장 많은 3개 사업이 선정돼 25800만원의 특별교부세를 확보했다.

청주시 옥산면 덕촌리 외에 나머지 2개 사업은 옥천군 청산 3·1독립만세공원 건립과 증평군 독립만세 발원지 기념비 사업이다.

옥천군의 만세공원은 청산면 3·1만세운동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사업이다. 22000만원을 들여 독립운동가 흉상 제작, 태극기 변천사 전시 등을 추진한다. 증평군은 광덕리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한다. 사업비는 6300만원이다.

충북도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독립운동으로 희생하신 선열의 얼을 기리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호국정신을 계승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선조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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