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의 아내 가네코 독립운동 ‘애국장’ 받는다
박열의 아내 가네코 독립운동 ‘애국장’ 받는다
  • 이재표
  • 승인 2018.11.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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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영화 ‘박열’로 회자…청주 부용(현 세종)서 유년 보내
히로히토 암살 모의하다 검거…대역죄로 사형언도 옥중자결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의사. 사진=영화 '박열' 다음 포토뷰어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의사. 사진=영화 '박열' 다음 포토뷰어

조선인 무정부주의자였던 박열의 아내로,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1989년 사망, 日王) 왕세자의 결혼식에 폭탄투척을 모의했다가 붙잡혀 옥사한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

가네코 여사의 존재는 20176월에 개봉한 영화 <박열>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세종경제뉴스는 가네코의 옥중자서전 <나는 나>(2012년 산지니 )를 통해 그가 어린 시절을 충북 부용면(현 세종시 편입)에서 보냈음을 보도(201773)했다.

국가보훈처는 12, “순국선열의 날인 1117일에 가네코 여사가 독립유공자 서훈(애국장)을 받게 됐다후손(친족)을 찾는 대로 서훈과 함께 독립유공자의 명패를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 선생은 서울고등보통학교(경기고 전신)에 다니던 18세 때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같은 해 10, 일본 도쿄로 건너갔고, 날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가네코 여사는 박열 선생이 쓴 시 <개새끼>를 통해 박열의 존재를 알게 됐고 1922년 친구의 소개로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무정부주의자로서 의열투쟁을 벌였던 두 사람은 인간의 절대평등에 가장 큰 장애물은 일왕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두 사람은 192310,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에서 일왕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 유입에 나섰지만 폭탄 투척 계획이 사전에 누설돼 체포됐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각각 20회 이상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재판정의 두 사람. 사진=다음영화 박열 포토뷰어
재판정의 두 사람. 사진=다음영화 박열 포토뷰어

두 사람의 재판과정은 영화 <박열>을 통해 통쾌하게 그려진다. 19262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박열 선생은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해 재판관을 꾸짖는다.

가네코 여사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자신을 박문자라고 밝힌다. 326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박 의사는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라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가네코 여사는 만세를 외쳤다.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한 혐의는 대역죄였다. 일제가 국제여론을 의식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지만 후미코는 1926723일 우쓰노미야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박열과 후미코는 같은 해 323일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해 법적으로 부부였다.

박열은 19451027일 석방될 때까지 일제감옥에서 223개월을 복역했다. 박열은 1949년 귀국했으나 반공주의자로 활동하던 중 19506.25 발발 직후 납북돼 1974년 북에서 사망했다.

가네코 여사는 옥중에서 자서전을 썼는데 이 책에는 23살로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아버지의 성을 사용할 수도 없었던 비운의 후미코는 어떻게 아나키스트로서 불꽃같이 살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은 그가 조선에서 살았던 7년의 생활에 있다.

옥중에서 결혼하고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을 영화가 재현했다. 실제 사진은 나중에 일본신문에 실린다. 사진=다음영화 박열 포토뷰어
옥중에서 결혼하고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을 영화가 재현했다. 실제 사진은 나중에 일본신문에 실린다. 사진=다음영화 박열 포토뷰어

가네코는 19121014일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入籍)하고 아버지의 누이(고모) 가메가 시집간 이와시타가(岩下家)가 있는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 맡겨지게 된다.

양녀가 될 줄 알고 온 조선생활은 식모살이 그 이하였다.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는 후미코의 조선생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2년 가을, 고모 집의 양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조선에 왔으나 오래지 않아 양녀에서 밀려나고 열두세 살 때부터는 사실상 식모로 전락하여 친할머니와 고모의 온갖 구박을 다 받으며 학교를 다니게 된다.

습자지나 그림물감 등 학교 준비물을 제대로 안 챙겨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엌일을 하다가 솥을 깨뜨렸다고 솥 값을 변상하게 하고, 정월 초에 떡국을 먹다가 할머니의 젓가락이 부러졌다고 집 밖으로 쫓아내고, 못사는 집 애와 학교 등하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말 안 듣고 함께 다녔다고 매타작을 한 후 헛간에 이틀이나 가두고, 그 일로 두 달이나 학교를 못 가게 한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는 한여름에 집에 다니러 온 할머니 친척의 애를 업고 그 친척 수행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할머니에게 짓밟혀 집밖으로 쫓겨나 이틀이나 먹지 못하고, 그 길로 자살을 결심하여 철길로, 강으로 내달렸으나 결국 자살을 포기한다.

학교에서는 운동이나 놀이를, 가정에서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가네코 후미코는 급기야는 책을 읽고, 잡지와 신문을 보는 것마저 금지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열네 살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가네코 후미코는 그로부터 일본으로 돌아올 때까지 2년 동안 하루 종일 할머니의 심술궂은 감시를 받으며 완전히 고모 집의 식모로 일한다.

191211월 부강공립심상소학교 4학년에 입학한 후미코는 1917324일 부강공립고등소학교를 졸업했다. 후미코는 1919년 조선인들의 만세운동에 큰 감동을 받고 1919412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미코가 살았던 부용면 부강리는 20127월 세종시 출범 과정에서 충북도에서 세종시로 편입됐다.

또 박열 선생의 고향은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현 문경시 모전동)지만 형 박정식 등 가족들은 1936년에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 847번지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 이제훈최희서 주연)에는 236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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