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전팔기로 이룬 오뚝이 건축사
칠전팔기로 이룬 오뚝이 건축사
  • 박상철 기자
  • 승인 2018.02.23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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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현장에서 배운 노하우로 내 집을 짓는다는 심정으로 설계
편집자 주=지난 1994년 창립한 (사)중소기업융합충북연합회는 현재 16개 교류회, 총 350여 개 회원사로 구성돼 있다. 이(異)업종간 자주적이며 자유로운 교류활동을 통해 역량을 강화한다는 게 특징이다. 회원사간 업종이 다르다 보니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세종경제뉴스는 (사)중소기업융합충북연합회 회원사를 집중 조명한다. 스무 번째 주인공 전형규 담원건축사사무소 대표다.
전형규 담원건축사사무소 대표 / 사진=박상철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도시는 점점 푸른빛을 잃고 회색 도시로 변했다. 도심은 쭉쭉 뻗은 고층 아파트와 콘크리트 빌딩이 거대 숲을 이뤄 녹색 갈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제는 획일화된 구조의 아파트 대신 ‘작더라도 내 스타일이 반영되는 집’을 직접 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를 가진 이가 있다. 합격률 10% 미만으로 어렵기로 소문난 건축사 시험에 무려 10년 동안 7전8기 도전 끝에 합격한 전형규 담원건축사사무소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현재 청주시 운천동에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전 대표는 청주 오창에 태어나 자랐다. 평소 놀기 좋아하는 성격에 공부는 항상 뒷전. 늘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던 아버지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며 그를 증평공고 건축과에 진학 시켰다.

처음 접해보는 건축이었지만 평소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터라 손을 사용해 배우는 것을 곧 잘 따라했고, 같은 반 친구들보다 실력도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 본 한 선생님의 추천으로 기능경진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제도경진반에 들어가게 됐다.

전 대표가 자신의 컴퓨터로 설계 도면을 그리고 있는 모습 / 사진=박상철

기능경진대회는 주제가 주어지면 그에 맞게 도면을 최대한 빨리 그려내는 게 관건. 평소 그의 실력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대회에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깨달은 것이 있다. 도면을 그릴 때면 평소 자신에게 볼 수 없었던 집중하는 모습에 본격으로 건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 보다는 건축 현장 경력을 쌓고자 A건축사사무소에 입사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독주택이나 상가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이론과 경험이 부탁한 탓에 실수도 많았지만, 그의 하고자 하는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리나케 현장을 누볐다. 퇴근 후 밤에는 건축 이론서와 씨름했다. 하나하나 쌓여가는 지식에 하루 2~3시간 쪽잠에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때마침 군대도 단기사병으로 복무하게 되면서 야간 근무를 맡게 됐다. 낮엔 사무소 일을 밤엔 군복무를 병행하며 1년 6개월 동안 그 생활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말하는 전 대표는 당시를 떠올리며 “젊어서 그런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시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안주 거리 삼아 이야기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전 대표가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는 모충동 4층 상가 건물 / 사진=박상철

그의 배움에 대한 갈망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 근무로 실전 경험은 풍부했지만 건축 이론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대전에 위치한 2년제 B야간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해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낮에 현장에서 접목시키며 빠르게 일을 배워 나갔다.

당시 같은 근무시간, 같은 일을 해도 4년제 졸업생들 월급이 많다는 걸 알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마냥 한탄만 할 수 없었다. 곧바로 그는 대전소재 4년제 C대학 3학년으로 편입했다. 숱한 현장 경험에 이제는 이론까지 더해져 뼛속까지 건축 인으로 다듬어졌다.

1997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를 그 역시도 피해갈 수 없었다. 어려운 사정에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다른 건축사무소로 옮겼지만 형편은 매한가지. 다시 회사를 관두는 상황에 놓이자 막막했다. 결심했다. ‘내 이름을 건 건축사사무소를 차려보자’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사 자격증이 필요했다. 94년부터 매년 일하는 중간 틈틈이 공부하며 시험을 봤지만 번번이 탈락. 첫 시험을 본 뒤 딱 10년만인 2004년 12월. 어렵게 건축사 합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공사 현장을 찾은 전 대표가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 사진=박상철

당시 그의 나이 39세.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합격증을 받아 드는 순간의 그 벅찬 감동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합격에 오랜 시간이 걸려서가 아니다. 열심히 살아 온 지난 시간을 보상 받았다는 기쁨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합격한 이듬해 2005년 1월. 사천동 건축 상가에 지금의 ‘담원건축사사무소’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건축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존 거래처가 없던 탓에 일감이 없어 현장 이곳저곳을 다니며 명함을 돌렸다. 각종 모임에도 적극 참여 자신을 홍보하고 알렸다.

그의 노력 덕분일까? 2007년. 지금도 그가 잊을 수 없는 가장 기억에 남는 설계를 맡게 됐다. 오창에 T사 공장 2동의 설계와 감리를 맞게 된 것이다. 이 공장은 설계에만 두 달이 걸렸고, 공장이 완공되기까지는 6개월의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이 공장을 지날 때면 밤잠을 설친 지난날의 기억이 파노라마로 스쳐지나간다. 이 외에도 전 대표 자신이 지은 건물을 지나거나 거기에 입주한 사람들이 집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할 때 건축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2007년 전 대표가 설계한 오창공장 조김도 / 사진=전형규

“35년 경력을 밑거름 삼아 어떠한 건물이든 내 건물처럼 설계해 짓는다는 게 제 사명입니다. 현재 단독주택과 공장을 많이 설계하고 있는데 설계를 의뢰한 사람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도록 제 자신도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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